“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에 관한 여러 가지 책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鎲鈀), 쌍수도(雙手刀) 등 여섯 가지 기예는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왔는데, 선묘(宣廟) 때 훈련 도감 낭청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 출정한 중국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찬보(撰譜)를 만들어 출간하였고.
정조 명에 의해 편찬된 무예 역사서 선대의 왕들이 이루어 놓은 무예 업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것이 무예도보통지입니다.
세마대 관무재
중종실록 55권, 중종 20년 8월 29일 병진 1번째 기사 / 습진과 관무재의 일을 다시 시작할 것과 그 방법에 대해 하교 하다
” 습진(習陣) 진법(陣法) 연습. 관무재(觀武才) 무과(武科) 시험의 한 가지. 임금이 친히 열병(閱兵) 한 다음 당상관과 그 이하의 군관(軍官) 및 한량(閑良)에게 무재(武才)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원본 무예도보통지 복사본
오산시 독산성 및 세마대지(禿山城洗馬臺址), 병기창兵器廠에서 무예 연습
대한민국 전통무예 진검무예 무사단
발행기관국립문화재연구소 사적 140호 (1964-08-29 지정)
기록에 의하면 백제 때 축성된 고성(古城)이고 통일신라나 고려 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요지였는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權慄將軍)이 적에게 장기간 포위당하여 식량 고갈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백마를 쌀로 세마 세마 (洗馬) 시켜 적으로 하여금 성내에 식수가 풍부한 것으로 오인하게 하여 퇴각게 하여 세마대(洗馬臺)라 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변이중(邊以中)으로 하여금 화포를 발명, 제작해 하여 행주대첩 (幸州大捷)에서 전승케 했다고 한다. 임란 후 조정에서는 독산성(禿山城)에 세마대(洗馬臺)를 세우고 석대산(石臺山)이라 부르던 것을 세마산(洗馬山)이라 하고 병기창(兵器廠)을 두어 무예 연습을 하게 했으며, 선조(宣祖) 35년(1602) 변응성(邊應星)이 다시 석성(石城)으로 수축하였고 正祖 16(1792)년 세마대(洗馬臺)를 중수하고 세마산(洗馬山)을 향로봉(香爐峰)이라 칭하였다 한다. 개축(改築) 당시의 성 둘레는 약 3.6km, 문이 4곳이 있었으나 현재 성역(城域) 10, 284평에 석성(石城) 약 400m와 성문지가 남아 있으며 세마대洗馬臺는 1957년 8월 15일 구기(舊基)에 복원하였다. 1964년 8월 29일 지정.
참고 자료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 총람》; 경기도, 1993, 《문화재 안내문 안집》
오산시 독산성은 선조들의 땀의 숨결과 민족의 기상을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고,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의해 보호 받고 보존되어야 할 곳 그곳이 “오산시 독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