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계광(1528~1587)은 둥주 인(登州人)의 명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수련하였다. 1544(嘉靖23년) 16세 때 부친의 관직을 계승하여 둥주위첨사(登州衛僉事)가 되었다. 1552년 일본 제후의 지지를 얻은 상인, 무사 와 선인들이 명 조정에 불만이 있는 명나라 인들을 이용하여 명의 동남 연해 지역에 대규모 침입 을 하기 시작하였다. 명은 이러한 왜구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척계광을 서도지첨사(署都指僉 事)로 임명하여 산동지역의 왜구 방비를 맡도록 하였다.
1555년에 절강도사첨서(浙江都司僉書) 에 전임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영소대참장(寧紹台參將)으로서 영파(寧波), 소홍(紹興), 태주 (台州) 등의 광범위한 지역의 왜구 소탕의 중임을 맡았다. 초기의 왜구 소탕은 명군의 장군들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저조로 인해서 순조롭지 않았다. 척계광은 여러 번에 걸쳐 왜 구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당시의 군대는 격렬한 싸움을 견뎌낼 능력이 없었고, 또한 잠항(岑港) 에서의 전역(戰役) 중 장시간에 걸친 왜구의 공격을 이겨 낼 수가 없었던 이유로 해임되었다. 그 는 이 일을 교훈으로 삼아, 직접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559년광부와 농부 삼천여명을 모집하여 장,단병기를 교대로 사용하는 전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스스로 연구하나 진법인 원앙진을 기본 전투의 대형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공격과 방어의 양면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군사의 전면전인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훈련 과정 속에 척계광은 군사훈련의 조항을 정리한것을 서적으로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4권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이다.